한번 판매된 특허제품, 특허권 살아 있을까

美 대법원, "재판매업체에 권리주장 못해" 판결

컴퓨팅입력 :2017/05/31 16:48    수정: 2017/05/31 17:28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기기를 싸게 판 뒤 잉크 카트리지 판매로 수익을 올리는 것을 기본 비즈니스 모델로 하는 프린터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대법원이 1회 사용 조건으로 싼 값에 유통된 프린터 카트리지를 재활용해서 판매할 경우 특허권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30일(현지시간) 1회용 프린터 잉크 카트리지 재판매를 둘러싼 공방에서 "판매하는 순간 해당 제품에 대한 특허권은 소멸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고 주요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특허 소진론’을 엄격하게 적용한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한번 판매된 카트리지를 재활용하는 것이 상당히 수월해지게 됐다. 이에 따라 HP, 캐논 같은 프린터 업체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사진=미국 연방대법원)

■ "재사용 금지" 조건부 판매 때 특허권은 어떻게?

이번 소송은 프린터 카트리지 생산전문업체인 렉스마크 인터내셔널의 제소로 시작됐다. 렉스마크가 2010년 재생 카트리지 전문업체 임프레션 프로덕츠를 특허권 침해 혐의로 제소하면서 법정 공방이 시작됐다.

렉스마크는 프린터 잉크 카트리지 관련 특허권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업체다. 이 업체는 자신들의 카트리지를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판매해 왔다.

조금 비싼 가격을 지불할 경우 무제한 재활용할 수 있다. 렉스마크는 이와 함께 할인된 가격에 공급하는 ’반납 프로그램’(Return Program)을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구입한 소비자들은 카트리지를 한번만 사용한 뒤 렉스마크에 다시 반납해야만 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반납하지 않자 렉스마크는 카트리지에 재사용 못하도록 하는 마이크로칩을 심어뒀다. 그런데 임프레션 같은 재생 전문업체들이 소비자들에게 카트리지를 싸게 구입한 다음 마이크로칩을 무력한 뒤 재판매했다.

(사진=렉스마크 인터내셔널)

그러자 렉스마크가 자신들의 특허권을 침해했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렉스마크는 소송에서 크게 두 가지 부분을 문제 삼았다. 하나는 ‘반납 프로그램’으로 판매한 카트리지를 다시 재활용하는 것이 특허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쟁점은 해외 시장에서 판매된 카트리지를 미국 내로 수입해서 판매하는 것도 특허권 침해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원고인 렉스마크는 1심과 2심 재판에서 모두 승소했다. 다만 1심 법원은 반납 프로그램으로 판매된 카트리지 재활용 부분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한 반면, 항소법원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특허권 침해라는 판결을 했다.

■ "한번 판매하면 독점적 특허권 부여 취지 충족"

하지만 연방대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원고인 렉스마크가 프린터 카트리지를 판매하는 순간 특허권이 소진된다는 것이 연방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특허권자가 판매하는 순간 그 제품은 더 이상 독점 영역 안에 있지 않게 된다”면서 “그 순간부터 구매자의 개인적 재산으로 바뀌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허권자가 제품에 제한을 가해서 판매하거나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자유다. 따라서 프린터 잉크 카트리지를 ‘1회만 사용’ 조건으로 판매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일단 판매하는 순간 그 제품에 대해선 더 이상 독점적 특허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허 침해 주장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연방대법원은 특허법의 근본 취지를 들어 이 같은 판결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 (사진=미국 대법원)

특허법이 발명자에게 독점적 권리를 부여해준 것은 재정적 보상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특허 제품을 판매하는 순간 특허법이 보장해준 재정적인 혜택을 충분히 누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이와 함께 해외에서 판매된 프린터 카트리지에 대해서도 다른 잣대를 들이댈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런 취지에 따라 원고인 렉스마크는 재생 카트리지 전문업체 임프레션에 대해 특허권을 주장할 수가 없다고 대법원은 판결했다.

대법관들을 대표해 의견서를 작성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첫 번째 판매 이후까지 특허권을 연장하는 것은 거래 채널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 "HP-캐논 등 프린터업체들 영향 받을 수도"

이번 판결은 ‘특허 소진론’을 엄격하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눈길을 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특허권자 과잉 보호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일침을 가했다는 점에서도 앞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판례가 될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판결로 HP, 캐논 같은 업체들이 직접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HP나 캐논 같은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프린터를 싼 값에 판매하는 대신 잉크 카트리지 판매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을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위협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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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 있는 쉬프 하딘 로펌의 특허 전문 변호사인 케빈 넬슨은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HP, 렉스마크 같은 회사들은 자신들의 제품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이렇게 될 경우 또 다른 혁신이 필요하게 돼 궁극적으로는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