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건 뉴스일까, 저널리즘일까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언론위기'에 대한 색다른 진단

데스크 칼럼입력 :2018/12/18 17:15    수정: 2018/12/18 22:36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뉴스의 역사’로 유명한 미첼 스티븐스는 17, 18세기에 유행했던 커피하우스와 살롱이 뉴스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역시 ‘공론장의 구조 변동’에서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커피하우스는 뉴스가 소통되는 장소였다. 때론 특정 주제로 수준 높은 담론이 오가기도 했다. 살롱에선 신분보다는 실력이 토론의 승패를 좌우했다. 평민이던 작가 스탕달이 파리 살롱 사회의 스타로 떠오른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다. 이런 문화는 하버마스가 공론장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기도 했다.

커피하우스와 살롱은 18세기 중순까지 뉴스 유통의 중심지였다. 한창 때는 주제별로 전문화된 커피하우스가 번성할 정도였다. 누군가 팩트를 전달하면, 그 팩트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분석이 뒤따르는 공간. 그래서 커피하우스와 살롱은 구어뉴스가 번성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단 평가를 받는다.

위르겐 하버마스. by photographer: Wolfram Huke at en.wikipedia

하지만 전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커피하우스와 살롱은 뉴스 유통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됐다. 그 자리를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TV가 대신하게 됐다.

중심축은 바뀌었지만, 뉴스 산업의 위세는 여전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지 않고선 뉴스를 대량으로 배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20세기말까지는 뉴스 산업의 전성시대가 계속됐다.

■ "뉴스는 2세기 가까이 유지해 온 문화적 관련성 잃고 있다"

21세기 들면서 이런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모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덕분에 누구나 메가폰을 잡고 떠들 수 있게 됐다. 대중들은 “저널리스트의 씨가 따로 있냐?”는듯 기자들의 고유 영역을 조금씩 잠식해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장의 문법도 달라졌다. 네이버 같은 포털이나, 구글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뉴스 유통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생산자들의 위세는 극도로 약화됐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유럽 같은 곳에서도 ‘플랫폼 종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저널리즘의 위기란 진단이 공공연하게 제기된다. 비즈니스 모델 부재로 언론사들의 수익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제기됐다. 혁신과 비즈니스 모델 개발이 단골 추천 메뉴였다. 그래야만 뉴스 산업이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란 충고다.

(사진=니먼랩)

그런데 하버드대학이 운영하는 니먼랩은 “죽어가는 건 오히려 뉴스다”는 색다른 진단을 내놓고 있다. 저널리즘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 아니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선 저널리즘은 건재해야만 한다는 고언까지 빼놓지 않고 있다. (☞ 니먼랩 글 바로가기)

뉴스가 죽어가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

간단한 얘기다. 뉴스는 문화적인 산물일 따름이다. 유포 기술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땐 뉴스가 희소 가치를 지녔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시의 정책이나 소식보다 친구들이 올린 ‘셀카’에 더 관심을 갖는다. ‘내가 관심 갖는 사소한 일’이 ‘공적 시민을 겨냥한 보편적 뉴스’보다 더 소구력이 강하다.

뉴스가 죽어간다는, 혹은 생명을 다해간다는 건 그런 상황 인식에서 나온 진단이다.

한번 따져보자. 매체가 다양하지 않던 뉴스는 대화를 이어가는 중요한 소재였다. 그런데 요즘은 뉴스를 대체할 소재들이 너무나 많다. 영화, 드라마 같은 전통 콘텐츠 뿐 아니라 유튜브, 넷플릭스, 트위터, 게임들이 무궁무진한 소재를 쏟아낸다. 뉴스가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뉴스는 2세기 가까이 유지해왔던 문화적 관련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와 함께 상품 가치도 상실하고 있단 진단이다.

■ "저널리즘 혁신, 문화적 형식에 대한 고민도 필요"

니먼랩은 이런 시대가 되면서 뉴스가 양갈래로 갈라진다고 진단한다. 팩트 위주 짧은 뉴스와 긴 서사형 이야기다.

짧은 뉴스는 이미 뉴스 직접 생산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언론사들이 경쟁력을 갖기 쉽지 않다. 불특정 다수들이 실시간으로 올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뉴스는 대중 소구력이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다.

또 다른 형태는 롱폼 내러티브 저널리즘이다. 다큐멘터리 책이나 팟캐스트, 동영상 등 형태는 다양하다.

이런 형태는 대중들에게 계속 어필할 것이란 게 니먼랩의 진단이다. 실제로 우리는 다양한 롱폼 내러티브물이 언론 고유의 영역이던 저널리즘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을 무수히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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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먼랩은 아예 “(포스트-뉴스 저널리즘 시대엔) 문학, 영화, 사진, 음악, 댄스 같은 오래된 예술 형태로 부터 영감을 받은 다양한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비즈니스 모델이나 기술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형식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할 때 진정한 저널리즘 혁신이 가능하다는 진단이다.

물론 이런 진단의 밑바탕엔 ‘저널리즘=민주주의의 수호자’란 상황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얘긴, 언론이 변화된 문화적 상황에 맞는 형식(과 스토리텔링) 실험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경우엔, (저널리즘 수호자) 지위를 다른 미디어들에게 넘겨줘야 할 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