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정책 제자리..."공무원, 공부 좀 해야"

[혁신성장 정책 2년 성적표]④블록체인...D학점

컴퓨팅입력 :2019/04/18 09:04    수정: 2019/11/26 08:53

임유경, 황정빈 기자

신생 산업인 블록체인은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전에 없던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와 상품이 쏟아지고 기술적 한계를 무너뜨리는 연구가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이 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순간 흐름을 놓치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블록체인 정책은 산업 발전 속도에 보폭을 맞추기는 커녕 1년 넘게 제자리 걸음 중이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분리해, 블록체인 기술만 육성하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암호화폐에 대한 정부의 막힌 태도 때문에, 실제 블록체인 기술 스타트업들이 사업을 해보지도 못하고 접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암호화폐를 활용한 해외간편송금 같이 새롭게 등장한 블록체인 서비스는 기존 규제에 막혀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암호화폐가 어느 부처의 소관도 아닌 '정책 공백' 상태에 방치돼 있어, 어디에 규제를 풀어달라고 호소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정부 블록체인 정책에 대해 ▲기술과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 ▲위험과 책임 회피 ▲소통부족 ▲변화 의지 부재 등의 문제점를 지적했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요소는 찾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D학점 이상을 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혁신성장 정책 2년 성적' 이렇게 매겼습니다

2017년 12월 정부는 암호화폐 가격이 치솟자, 이상 투기 현상으로 규정했다. 당시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암호화폐 거래소를 폐쇄한다는 강경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 출범 5개월만에 가장 뜨거운 이슈로 부상한 블록체인

2017년 9월. 온 나라가 들썩거린 암호화폐 상승장이 시작됐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암호화폐가 수십~수백퍼센트씩 급등하는 일이 1월까지 거의 매일 일어났다. 암호화폐는 물론 기반 기술이 되는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도 이 시기 갑자기 폭증했다.

이 시기는 블록체인 기술이 재조명 받는 계기가 됐다. 블록체인이 서로 신뢰할 수 없는 개인과 개인이 중재자 없이도 직접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신뢰의 네트워크 기술'이라는 점이 알려졌다. 일반 소비자는 물론 기업들도 그 혁신성에 큰 기대를 가지게 됐다.

모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5개월만에,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깊이 들여다보고 관련 정책을 정교하게 세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부가 ‘암호화폐는 투기 광풍을 일으킨 문제적 존재로, 블록체인은 4차산업혁명 핵심 기술로’ 인식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후 투기 시장은 잠잠해지고, 블록체인 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는데도 인식의 전환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 블록체인은 인정하면서도, 암호화폐는 철저히 외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블록체인 기술 발전 전략'은 정부에서 처음으로 나온 체계적인 블록체인 정책이다. 블록체인 인력 양성, 전문기업 지원, 공공 시범사업 실행, 핵심기술 개발 등의 사업을 포함하고 있다. 2022년까지 1만명 규모의 블록체인 인력 양성, 100여 개의 블록체인 전문기업 육성, 선진국 대비 90% 수준 기술력 확보라는 목표도 제시했다.

하지만, 암호화폐와 관련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단번에 "반쪽짜리 정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암호화폐는 퍼블릭 블록체인(누구에게나 참여가 개방된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인센티브이자, 블록체인 내 경제 시스템을 구현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요소다. 또 암호화폐 자체가 송금, 지불결제, 가치이전의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서비스가 기존 인터넷 기반 서비스와 차별화된 경험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원천은 암호화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암호화폐와 관련해서는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를 중심으로 자금세탁방지나 이용자 보호 등 부작용을 해소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라고만 답했다. 암호화폐를 여전히 ‘투기 광풍을 몰고온 주범’ 정도 보는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지난 1월 정부는 ICO 전면 금지 기조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ICO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무조정실과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난해 9월부터는 암호화폐공개(ICO) 실태조사와 그 결과 분석이 이뤄졌다. 조사는 사기 ICO 프로젝트를 걸러내고 투자자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암호화폐와 ICO에 대한 제대로된 규정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속적인 업계 요구에 따라 이뤄졌다.

국조실은 4개월간 조사·검토를 거쳐 지난 1월 말 “암호화폐 투기과열 현상 재발과 투자자 피해 확산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가이드라인 마련을 포함해 'ICO 제도화'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7년 9월 ICO 전면 금지 발표 이후 정부에서 ICO에 대해 첫 공식 입장을 내놓은 것인데, 1년 전과 비교해 전혀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ICO와 암호화폐는 제도권에서 다루지 않겠다는 게 범정부차원의 입장이라고 쐐기를 박은 셈이 됐다.

■4차위·규제샌드박스도 암호화폐 문제 풀지 못할 것으로 보여

문재인 정부 혁신성장 정책은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 혁신을 촉진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가능하면 산업계 목소리를 반영해, 기업할 맛 나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규제혁신을 위해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가동하고, 규제샌드박스 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블록체인 산업은 여기에서도 소외 당하고 있다.

장병규 4차위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기를 출범하며 ‘블록체인·ICO TF’를 꾸려 블록체인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 권고안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당초 2월에 구성될 예정이었던 TF는 2개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대한 논의의 장조차 열리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4차위 블록체인·ICO TF팀의 출범 여부 자체도 불투명해졌다.

4차위 안팎에선 국조실이 ‘ICO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ICO 전면 금지 정책 기조 유지한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4차위 위원인 이상용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블록체인·ICO TF를 할지 안 할지 논의 자체가 안 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국제적인 동향이나 정책을 보고 그 다음에 (TF 출범 등)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4차위 장병규 위원장은 2기 위원회 출범식 때 블록체인TF팀 구성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TF팀 구성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사업 지정을 위해 연 신기술·서비스 심의원회에서도 블록체인 기반 해외 송금 서비스는 1차에 이어 2차에서도 안건에서 제외돼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1월에 ICT 규제 샌드박스에 접수된 9개의 안건(기업기준 10건) 중 1차에 이어 2차 심의위원회에서도 안건에 오르지 못한 건 블록체인 기반 해외송금 서비스 모인이 유일하다.

과기정통부는 4월 시행 예정인 금융위원회 ‘금융 규제 샌드박스’ 과제와 통합된 기준의 심사가 필요하다며 모인에 대한 심사를 유예했다.

하지만 금융 규제 샌드박스 우선심사 대상 서비스로 선정된 19건 중 암호화폐와 관련된 것이 없다. 4월 말 열릴 ‘제3차 신기술·서비스 심의위원회’ 전에 과기정통부와 금융위의 암호화폐에 대한 통합된 심사 기준이 마련될 수 있을지, 모인이 3차 심의위원회에서 논의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블록체인 기반 해외 송금 서비스 모인의 서일석 대표는 “정부가 암호화폐 투기 열풍을 염려해 암호화폐를 매개로 하는 해외 송금 서비스에 대한 합의가 잘 안 이뤄지는 것 같다”면서도 “우리같은 스타트업이 관련 서비스를 한다고 해서 장이 얼마나 반응하겠나”라고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를 종합해 보면 당분간 정부의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을 분리하고, 암호화폐는 금기시하는 정책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 블록체인 정책 D학점"

지금까지 정부의 블록체인 정책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보였다. 기술과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받아들일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누구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는 게 낮은 점수를 준 이유다. 또, 공개적인 자리에서 업계와 학계의 목소리를 들어 보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 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정엽 블록체인법학회장은 “부처 공무원들은 아직 너무 공부가 안 돼 있는 것 같다”며 “지금 엄청난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을 지적했다. 이어 블록체인은 기술, 금융뿐 아니라 음악부터 미술까지 모든 분야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블록체이니즘’이라고 불러야한다. 이 산업의 잠재력은 쉽게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고 엄청난 기회가 생길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 학회장은 ‘소통 부족’도 블록체인 정책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정부 관료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공개된 자리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도 해야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데 지금은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누가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이 학회장은 이어 “기회를 붙잡으려면 강력한 규제가 있더라도 일부는 허용을 해줘야 한다"며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로드맵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박주현 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 IT블록체인 특별위원회 간사)는 “블록체인·암호화폐에 대해 아무 규정도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우리나라 상황은 악법을 넘어 무법이다. 장려만 하는 법도 규제만 하는 법도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가장 나쁜 건 무법이다. 지금 우리나라 암호화폐 거래 시장은 무법천지다. 완전 도박판이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또 “겉과 속이 다른 정책이 기업에 좌절을 주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블록체인은 장려한다면서 암호화폐에 대해선 닫힌 정책을 펴고 있다. ‘블록체인 장려’라는 말만 들으면 뭔가 정부가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사업을 해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안되는 상황이다"고 꼬집었다.

박 변호사는 “집권 3년차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정부가 IT/블록체인 분야에 정책을 완전히 전환하지 않으면 많은 젊은층들에게 외면을 받고 성공하는 정부가 되기 힘들어 질 수 있다"고 제언했다.

박수용 서강대 컴퓨터공학과 교수(한국블록체인학회 회장)은 “신기술이 도입될 때 약간의 혼란은 항상 있는데 정부가 암호화폐는 너무 두려워하고 있다"며 “혼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혁신을 못하고 있다"고 현 상황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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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혁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데 정책관료들이 피하고만 싶어 한다. 조금 더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어 “무조건 금지하기 보다 적정한 규제틀 안에서 뭔가 할 수 있도록해줘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만들어 질 것이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