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 기소 계기로 판결유예 제도 고민해봐야

[이균성의 溫技]법의 불충분성과 사회적 합의

인터넷입력 :2019/11/19 10:55    수정: 2019/11/21 12:45

법(法)이 보통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상식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상식이란 것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을 때 생긴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그런 상식이 많다. 서로 완전히 배반되는 상식이 대립하면서 굳건하게 존재한다. 그럴 때 법은 난처해진다. 사회가 반으로 쪼개져 대립할 때 법은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 또 그 편들기의 기준은 무엇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법에 과문하여 잘 모르긴 하지만 법학자나 법철학자들이 이미 이에 대해 많은 주장을 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 많은 연구 또한 이 어려운 숙제에 관한 한 완전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 사회는 법지상주의가 온전히 자리잡았을 터이나 법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난무한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를 운영하는 데 법은 꼭 필요하지만 그게 만능일 순 없다는 거다.

VCNC가 서비스 중인 '타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완전한 사회’가 존재할 수 없듯 법 또한 완벽하지 않다. 법은 만드는 과정(입법)도 집행하는 과정(사법)도 알고 보면 구멍투성이다. 법이 상식과 조금이라도 더 부합하기 위해서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이 이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법이 낄 자리와 빠질 자리 정도는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문제는 그걸 구별 못하는 법조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법조인이 오만에 빠져 상식과 괴리될 때 법은 문제를 푸는 수단이 아니라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괴물이 된다. 이런 사례는 숱하다. 차량 공유 서비스인 ‘타다’의 관계자와 관련 회사를 기소한 것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이들을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면 우리 사회에 입법기관인 국회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한 번 정한 법은 만고불변일 터이므로 새로 법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왜 필요하겠는가.

욕을 바가지로 먹는 국회지만 법이 꼭 필요하듯 국회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왜 그럴까. 세상은 박제화된 법조항에 갇힐 수 없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세상이 변하면 상식이 변한다. 상식이 변하면 법도 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것이고, 해당 법의 유효기간은 변화의 속도만큼이나 짧다. 이에 맞춰서 변하지 않는 법은 흉기가 될 수 있다.

‘타다’는 4차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우리 사회의 한 복판에 있는 서비스다. 이 변화는 불가피하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에 맞춰 우리 사회의 상식도 변해가고 있다. 이제 관련법을 바꾸고 새로 정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지 않고 옛 법에 맞춰 두드려 잡으려고만 하면 그건 법의 오남용일 수밖에 없다.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고 문제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검찰의 기소 결정이 그랬다. 조금 과장하면 미니스커트 입었다고 연행한 꼴이다. 실제로 검찰의 기소 이후에 승차공유 혹은 새로운 모빌리티 사업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모든 행위는 중단된 듯하다. 사회의 진전을 위한 행보는 중단되고 모두가 낡은 법을 지켜보며 이에 의존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검찰이 법의 불충분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고발이 들어와도 기소유예를 했어야 했다.

그 모든 행위가 적법하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칼잡이’라고 지칭한다는 검찰의 오만과 편견이 낳은 폐해다. 이 문제는 이제 법원으로 넘겨졌다. 낡은 법을 기준으로 할 때 타다의 서비스가 위법한 지 적법한 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 글은 그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법조인의 겸양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간혹 낄 자리인지 빠질 자리인지를 판단하는 게 가장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법조인이 낄 자리인지 빠질 자리인지를 고민할 때 검찰에게 기소유예가 있다면 법원에는 선고유예가 있다. 선고유예는 범정(犯情)이 경미한 범인에 대하여 일정한 기간 형(刑)의 선고를 유예하고, 그 유예기간을 사고 없이 지내면 형의 선고를 면하게 하는 제도라고 한다. 형을 집행하지 아니하고서도 형벌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취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판결유예라는 제도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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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든 이들 모든 유예는 범죄를 전제로 한다. 범죄자마저 집행을 유예하는 것은 법의 불충분성과 불완벽성을 인정하기 때문일 터다. 하물며 범죄를 다투기 힘들다거나 범죄를 다투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그 문제를 푸는 데 꼭 법조인이 나서야 하는 지 의문을 씻을 수 없다. 그런 사안은 설사 고발이 되더라도 사회로 돌려보내 합의를 하게 하는 판결유예 제도의 도입이 필요해 보인다.

사족 하나 달겠다. ‘타다’ 측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큰 혁신은 ‘파괴적’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파괴적’이라는 의미가 사회의 많은 구성원을 적(敵)으로 삼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단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혁신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의도였다면 합의를 통해 갈등을 푸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두는 게 옳다.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는지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