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LG맨' 故구본무 회장, 뚝심 하나로 최고 만들었다

핵심 사업에 과감한 도전…'일등 LG' 성장 주도

디지털경제입력 :2018/05/20 15:58    수정: 2018/05/20 19:55

“어떤 사업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그 과정이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도에 포기하거나 단기 성과에 급급해하지 않고 부단히 도전해 결국에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이날(20일) 숙환으로 별세한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이다. 고인은 사업에 있어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승부사’였다. 그의 집념은 LG 핵심 사업을 최고의 자리로 이끌었으며, 회장 취임 당시 매출액을 30조원 규모(1994년 말)에서 GS, LS 등을 계열분리하고도 160조원 규모(2017년 말)로 5배 이상 성장시켰다.

국내외에서 근무하고 있는 임직원 수도 같은 기간 약 10만 명에서 약 21만 명으로 2배 가량 늘어났다. 이 중 약 8만여 명이 200여 개의 해외 현지 법인과 70여 개의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해외매출은 110조원대로 구 회장의 취임 당시 10조원에서 열 배 이상 비약적으로 신장했다.

구 회장은 가전, 기초소재 등 전자와 화학 분야의 주력사업을 세계 최고로 키운다는 목표로 선제적인 투자와 역량을 집중해 흔들림 없이 탄탄히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사업으로 이끌었다. 가전 사업은 명실상부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으며, 석유화학의 기초소재 사업도 고부가 제품 개발을 통해 든든한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사업으로 안착했다.

구본무 LG 회장(사진=LG)

고인은 회장 취임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글로벌 경영에서는 초일류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해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전·디스플레이·전지·통신 진출 결단…LG 핵심 역량 다져

구 회장의 ‘집념의 승부사’와 같은 면모는 ▲부회장 시절부터 끈기 있게 개척한 이차 전지 사업 ▲단호한 결단으로 키운 OLED TV 등 디스플레이 사업 ▲통신 사업으로의 과감한 진출 등에서 잘 나타난다.

구 회장은 90년대 초반 당시 국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이차 전지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20년 넘게 끈기 있게 연구개발 투자를 지속하며 현재 LG의 핵심 성장사업이자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사업으로 키워냈다. 1992년 당시 부회장이었던 구 회장은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방문한 영국 원자력연구원(AEA)에서 충전해서 반복 사용이 가능한 이차 전지를 처음 접하고, 미래의 새로운 성장사업이 될 가능성을 봤다.

구 회장은 이차 전지 샘플을 직접 가져와 당시 계열사였던 럭키금속에 이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에는 전지 연구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하도록 해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

1996년 10월 구 회장(왼쪽 첫 번째)이 LCD 공장을 방문해 생산제품을 점검하고 있다(왼쪽). 1996년 10월 구 회장(왼쪽 첫 번째)이 LCD 공장을 방문해 생산제품을 점검하고 있다(오른쪽).(사진=LG)

하지만 90년대부터 수년간의 투자에도 불구, 가시적인 성과가 없자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하라.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보라”고 독려했다. 2005년 이차 전지 사업이 2천억 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라고 전했다.

그 결과 LG화학은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한 데 이어 중대형배터리 분야를 적극 개척해 현재 '전기차 배터리 제조 경쟁력 평가'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제조 경쟁력 평가' 등 중대형 이차 전지 사업 경쟁력 면에서 선두권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수년간의 투자에도 불구, 가시적인 성과가 없자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하라.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보라”고 독려했다. 2005년 이차 전지 사업이 2천억 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라고 전했다.(사진=LG)

1998년 말에는 당시 정부가 주도한 빅딜 논의로 반도체 사업의 유지가 불확실해진 위기 상황에서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영위하고 있었던 LCD사업을 본격 육성해야겠다는 의지로 이들을 따로 분리해 별도의 ‘LG LCD’를 설립했다. 그룹의 운명과 미래를 보고 디스플레이 사업 육성이라는 신속하고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반도체 빅딜 직후 LG는 14개월 동안 지속됐던 외자유치 협상에 속도를 올리며 전력투구해 1999년 5월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당시 국내 민간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6억 달러의 자본유치에 성공하고 3개월 후 합작법인 LG필립스LCD를 출범시켰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LCD분야의 기초 기술력을 보유한 필립스와 응용기술이 강한 LG의 공동 합작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 합작으로 LG는 대규모 신규투자에 따른 자금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전세계 LCD시장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적기에 대응할 수 있는 공급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LG는 2008년 필립스와 결별,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를 출범시켰고, 이후 더욱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 기업으로 거듭났다.

1996년 10월 구 회장(왼쪽 첫 번째)이 LCD 공장을 방문해 생산제품을 점검하고 있다.(사진=LG)

이에 앞서, 구 회장은 취임 이듬해인 1996년 개인이동통신사업(PCS)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미래 정보화시대의 통신산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이동통신사업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로써 ‘전자-화학-통신서비스’ 3개 축으로 이뤄진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LG는 축적된 통신 기술과 장비개발 경험, 우수한 경영능력 등을 인정받아 1996년 6월 사업권 획득해 LG텔레콤을 출범했다. 이어 2000년 유선통신사업체인 데이콤을 인수하며 통신사업을 강화했으며, 2010년에는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등 통신 3개사의 합병을 통해 유무선 통합 LG유플러스를 출범하며 통신사업을 LG의 주력사업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상용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98년 매출 약 1조원을 기록한 LG텔레콤은 통신 3사 합병 등을 거치며 종합통신사로 위상을 갖추고 지난해 매출 12조원대로 성장했다. 특히 구 회장은 LG유플러스 네트워크 구축 초기 단계서부터 과감한 투자 결정으로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기존 3G보다 5배 빠른 4G LTE 시대가 왔을 당시 구 회장의 결단으로 LG유플러스는 당초 3년 계획이었던 LTE 전국망 구축을 단 9개월 만에 끝내고 LTE 서비스를 시작했다.

LG유플러스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LTE 핵심 서비스 후발주자로서 10년 넘게 17%대를 맴돌며 고착화된 이동통신 시장점유율을 20%대까지 끌어 올렸다. 현재 LG유플러스는 유·무선통신을 넘어 홈, 공공, 산업 분야 등을 연결하는 종합 솔루션을 보유하게 됐다. 5세대 이동통신(5G), 인공지능, IoT 관련 신사업에 투자를 집중해 차세대 통신망 인프라와 인공지능 플랫폼 등에서 시장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누구나 인정하는 1등 LG' 목표…끝없는 경영혁신에 나서다

구 회장은 취임 당시 부친으로부터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는 당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은 경영혁신의 마지막 단계로, 젊고 도전적인 경영진으로의 세대교체를 통해 미래 사업을 주도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한다는 결심에 따라 국내 대기업 최초의 무고(無故) 승계를 진행했다. 이는 구 명예회장이 1988년부터 시작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에 의한 LG의 ‘변혁 1기’가 마무리되는 것인 동시에 ‘변혁 2기’의 출발이었다.

1999년 8월 구 회장(오른쪽)과 구자경 명예회장(왼쪽)이 담소하고 있는 모습.(사진=LG)

구 회장이 취임 후 3년이 채 안된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국내 기업들은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이나 방향은 기업마다 사뭇 달랐다. 이 시기에 구 회장이 가장 중요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던 출발점은 기존 경영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 기업의 체질을 탄탄히 하는 것이었다.

LG는 재무구조개선 작업에 착수, 돌파구를 대규모 외자유치와 적극적인 기업공개(IPO)에서 찾았다. 외자유치는 재무구조 개선의 차원을 뛰어넘어 글로벌 기업들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선진 경영기법을 벤치마킹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 회장은 당시 경영진들에게 “적극적인 외자유치 활동은 생존차원의 경영활동”이라며 외자유치 활동을 독려했고, 그룹 최고경영진도 직접 나서 다방면으로 외자유치를 위해 노력했다.

1998년 말 첫 번째 주요 성과로 LG텔레콤이 영국의 BT(British Telecom)로부터 4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 데 이어, 여러 계열사에서 다우케미컬, 칼텍스, 골드만삭스, 독일재건은행 등 해외 우량기업 및 금융기관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당시 국내 대기업집단으로는 최다금액인 67억 달러의 대규모 외자유치에 성공했다.

구 회장이 2011년 글로벌CEO전략회의에서 최고경영진과 대화하고 있다.(사진=LG)

이와 함께, 우량 계열사 중 상장요건을 갖춘 회사는 적극적인 기업공개를 통해 상장시켜 경영투명성을 확보하고 시장에서의 공정한 기업가치를 평가 받도록 했다. LG생활건강, LG텔레콤 등 7개 우량계열사가 상장되며 주력기업 대부분이 직접 금융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고, 경영전반에 걸쳐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고, 경영투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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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장은 2005년 LG 고유의 기업문화로 ‘LG 웨이(Way)’를 선포했다. ‘LG 웨이’는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을 ▲실력을 배양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정도경영’의 행동방식으로 ▲궁극적인 지향점인 ‘일등 LG’, ‘시장선도 기업’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일등 LG’,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달성해야 할 목표입니다. 고객이 신뢰하는 기업, 투자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기업, 경쟁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어하는 기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