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와 빌 게이츠의 멋진 퇴장

"MS 이사 사임→자선활동 전념" 선언

데스크 칼럼입력 :2020/03/14 11:00    수정: 2020/10/05 13:46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2000년 1월.

세상은 아직 새천년의 감격에 젖어 있었다. IT 시장엔 새로운 패러다임이 몰려 왔다. 신생 인터넷기업 AOL이 타임워너를 깜짝 인수한 사건은 이런 분위기를 대표했다. 닷컴 시대가 활짝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MS)는 뒤숭숭했다. 윈도 끼워팔기 때문이었다. 떠오르는 인터넷기업 넷스케이프를 내쫓기 위해 저지른 반칙이었다.

미국 정부는 ‘MS 분할론’을 본격 거론했다. 여론도 악화됐다. 언론은 MS를 ‘악의 제국’이라고 힐난했다. 당대 최고기업 MS가 창사 이래 최대 위기 상황으로 내몰렸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인자 빌 게이츠의 2선 퇴진 밖에 없었다. 창사 이래 혼자만 차지했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대학 친구 스티브 발머에게 물려줬다. 대신 빌 게이츠는 ‘최고소프트웨어책임자’란 생소한 직책을 맡았다.

(사진=빌 게이츠 링크드인)

2000년 2월.

여전히 회사는 혼란스러웠다. 늘 1인자였던 빌 게이츠는 스티브 발머 밑에서 일하는 상황이 낯설었다. 이것 저것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핫이슈는 X박스 게임기 개발. 빌 게이츠의 오지랖은 계속됐다. 윈도 미래 전략 역시 빌 게이츠의 입김이 작용했다.

“아무리 친구지만, 너무 한 것 아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스티브 발머는 폭발했다. 파리 출장을 갔던 발머는 고위 간부에게 “누가 MS CEO냐”며 불만을 털어놨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하는 소식이다.

이사회 뿐 아니라 두 사람의 부인들까지 중재에 나섰다. 문제는 스티브 발머가 아니라 빌 게이츠에게 있었다. 결국 ‘1인자 욕심’을 접고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 2000년 2월 자선재단 설립…20년 만에 MS 이사직 사임

뭔가에 집중해야 했다. 그 순간 멜린다 게이츠가 나섰다. 50억 달러를 출연해 자선기관을 만들었다. 빌&멜린다게이츠 재단. 이 때부터 ‘잔혹가 자본가’ 빌 게이츠는 조금씩 ‘창조적 자본주의자’로의 변신을 시작했다.

세상에선 이런 얘기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게이츠가 달라졌어요.” 그는 정말로 달라졌다. 소프트웨어 사업에 집중하던 빌 게이츠가 아프리카 오지에 나타나는 일이 잦았다.

시간을 훌쩍 건너 뛰자.

2020년 2월.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기념 행사가 열렸다. 빌 게이츠는 “기후 변화 문제에 좀 더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사진 오른쪽)이 자선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빌&멜린다게이츠재단)

그리고 얼마 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미국에선 하필이면 MS 본사가 있는 워싱턴 주에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코로나19가 몰고온 파장은 생각보다 더 컸다. 결국 망설이던 세계보건기구(WHO)도 ‘팬데믹 선언’을 하고 말았다. WHO 설립 이후 세 번째 팬데믹 선언이었다.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은 1억 달러를 쾌척했다. 가정용 코로나19 진단 키트 보급 운동에 적극 나섰다.

재단의 이런 움직임은 특별할 건 없었다. 이미 2년 전인 2018년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은 헬스케어 문제에 좀 더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전 세계가 아직 팬데믹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기후 변화 문제와 팬데믹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문제다.

그리고 나온 선언.

“자선 사업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기 위해 MS와 버크셔 헤서웨이 이사직에서 물러나겠다.”

빌 게이츠는 13일(현지시간) 링크드인을 통해 ‘MS 이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은 깜짝 선언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최근 상황과 빌&멜린다게이츠재단의 활동을 감안하면 당연한 행보다.

이런 반응도 있다. “빌 게이츠는 진작 MS를 떠난 것 아니었나.”

물론 아니다. 그 얘길 하려면 시간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

■ 2008년부터 조금씩 은퇴 준비…"MS는 새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

2006년.

빌 게이츠가 레이 오지를 영입했다. 그리곤 자신이 맡고 있던 최고소프트웨어개발자 직함을 물려줬다. 레이 오지는 그 무렵 세계 3대 개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곤 이런 선언을 했다.

“요즘 내 시간의 80%는 MS를 위해, 나머지 20%는 자선사업에 쏟고 있다. 앞으로 이 비중을 바꾸겠다.”

빌 게이츠는 그 시한을 2008년으로 잡았다. 그리고 약속대로 2008년 MS 상근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사회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 무렵 스티브 발머가 이끌던 MS는 서서히 미궁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애플이 주도한 ‘모바일 시대’와 동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회사 내에 다시 위기의식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스티브 발머가 2선으로 퇴진하고 사티아 나델라가 CEO 자리에 올랐다. 2014년이었다. 나델라는 MS 내에서 클라우드 전문가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클라우드 퍼스트’ 전략을 본격적으로 밀어부쳤다.

사티아 나델라(사진 가운데)가 MS CEO로 취임하던 날.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의 모습도 보인다.

CEO가 된 나델라는 빌 게이츠에게 “완전히 떠나진 말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맡게 된 것이 기술고문직이었다. MS 이사회에도 그대로 남았다. 역시 나델라의 부탁이었다. 다만 이사회 회장에서는 물러났다.

그 때 이후 지금까지 빌 게이츠는 MS 비상근 이사였다.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유지하고 있던 ‘MS 이사직’까지 내려놨다.

링크드인에 올린 글에서 밝힌 빌 게이츠의 소회.

“이사직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MS에서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니다. MS는 내 삶에서 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사티아와 함께 MS의 비전을 만들고, 야심찬 계획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기술적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하겠다.”

■ 2018년 "팬데믹 대비해야" 주장…코로나19 사태로 결단?

빌 게이츠는 이번 결정이 ‘예정된 행보’인지 ‘깜짝 결정’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2018년 기고했던 글을 통해 짐작해볼 순 있다.

2018년은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 발병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빌 게이츠는 매사추세츠의학협회가 발간하는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매디신’에 ‘팬데믹을 위한 혁신’이란 글을 기고했다. (☞ 빌 게이츠 글 바로가기)

그는 최근의 과학 발전 덕분에 소아마비나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말라리아 같은 질병으로부터 해방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팬데믹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 무렵 사스, 메르스 같은 신종 질병으로 전 세계가 홍역을 앓고 난 뒤였다. 빌 게이츠는 앞으로 자신은 팬데믹 문제에 좀 더 힘을 쏟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이 문제는 좀 더 크게 보면 기후 변화 같은 주제와도 맞닿는 문제다.

갑작스러워 보이는 빌 게이츠의 MS 이사 사임 선언이 새로워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스페인 독감 발병 100년 째인 2018년에 팬데믹 문제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 게이츠. 한 때 'SW 황제'로 불렸던 인물.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잔혹한 자본가이기도 했다. 경쟁자로 떠오르는 기업이 있으면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래서 그가 만든 회사는 '악의 제국'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2000년대 들어 멋지게 변신했다. 2008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선 '창조적 자본주의'란 멋진 화두를 던졌다. 변신 과정에서 아내 멜린다 게이츠가 많은 역할을 했다.

이제 그는 ‘팬데믹’이란 또 다른 인류의 악재와 정면으로 맞선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나온 MS 이사직 사임 소식은 그래서 더 반갑다.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빌 게이츠에게 좀 더 큰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더 큰 그림을 그려내라고 재촉하게 된다. 이런 요구는 야박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11년 전 난 '빌 게이츠'란 책을 출간하면서 이렇게 마무리한 적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부자도 쉽게 실천하지 못했던 자선사업에 온몸을 내던지고 있는 ‘창조적 자본주의자’에게 좀 더 큰 그림을 그려내라고 타박하는 것이 박정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빌 게이츠에게 좀 더 큰 짐을 지라고 요구해야만 한다. 이런 요구를 하는 건 그가 지금 자선사업에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혼자만 떠안고 가기엔 너무나 크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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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빌 게이츠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많은 능력들과 지구상에서 빌 게이츠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라면,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문제에 한번쯤은 도전해 볼 수 있을 듯 해서이다.” (빌 게이츠, 91~92쪽)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빌 게이츠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