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거셌던 21대 총선…김수영 시인의 산문을 다시 읽다

'주전자 속 물 끓는 소리'의 위력

데스크 칼럼입력 :2020/04/16 11:28    수정: 2020/10/05 13:4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마루의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다. 조용히 끓고 있다. 갓난 아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이 소리가 (중간 생략) 현대의 거악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지만, 못 거꾸러뜨린다고 장담하기도 힘든다.” (김수영 '삼동유감' 중)

전문가들의 예상을 무력하게 만든 총선 결과를 보면서 김수영 시인의 산문집을 펼쳤다. 그리고 ‘삼동(三冬)유감’이란 산문을 다시 읽었다. 40여 년 전 시인의 통찰이 가슴 깊숙이 박혀 온다.

21대 총선이 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더불어민주당과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이 180석을 확보했다. 전체 의석의 5분의 3을 가져갔다. 단일 정당이 이 정도 의석을 차지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이다.

방송 3사의 출구 조사 예상까지 무력하게 만든 일방적 승부였다. 선거가 끝난 직후 방송 3사는 여당이 153~178석 내외를 얻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개표 결과 25석 가량의 넓직한 오차 범위를 벗어났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상황실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뉴스1)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분석하는 건 내 역량 밖이다. 그건 정치 평론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몫이다. 다만 이번 선거를 통해 ‘민심이 정말 무섭다’는 뻔한 성찰을 하게 됐다는 말만 덧붙인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깊이 성찰했던 김수영 시인

내가 김수영 시인의 ‘삼동유감’을 다시 펼쳐든 것도 그 때문이다. ‘삼동유감'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한 해인 1968년에 쓴 산문이다. 시인은 영화 ‘25시’를 본 뒤 저 산문을 쓰게 됐다고 고백한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원작 소설을 소재로 한 영화 ‘25시’는 거대 악 앞에서 무력하게 당하는 한 농부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 속의 소설가는 용감하게 저항하다가 죽는다. 그런데 김수영 자신의 삶은 너무나 소시민적이다. “이 극장에, 이 거리에, 저 자동차에, 저 텔레비전에, 이 내 아내에, 이 내 아들놈에, 이 안락에, 이 무사에” 마비되어 있는 것만 같다. 거대한 변혁을 꾀하기엔 너무나 사소하고, 너무나 소시민적인 것 같다.

시인의 성찰은 계속된다.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자기 문제였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집안의 자디잔 일들”에 시달리다보니, 변혁의 동력이 되지도 못한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통해 또 다른 성찰에 이른다. 그게 이 글의 백미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 마련된 개표 상황실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스1)

“갓난 아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이 소리가 ~ 현대의 거악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지만, 못 거꾸러뜨린다고 장담하기도 힘든다”는 성찰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갓난 아기의 숨소리보다 약한’ 것 같았던 국민들이 거대한 정치 지형을 확 바꿔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여야 모두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패배한 야당은 왜 국민들이 정권 심판 대신 야당 심판을 택했는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집권 3년이 지난 시점에 야당이 이 정도로 참패한 선거는 유례를 찾기 쉽지 않다. “오만한 야당으로는 오만한 정부를 심판할 수 없다”는 어느 후보의 말에서 성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선거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한다. ‘주전자 속 끓는 물’은 오만한 야당, 민심을 내팽개친 야당을 심판했다. 여당이 압승한 건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덜 못한 덕분이다.

이번 선택엔 “제대로 일하는 국회를 만들라”는 준엄한 경고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새겨야 한다. 그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주전자 속 끓는 물’에 불과해 보였던 민심이 또 다시 싸늘하게 돌아서버릴 수도 있다.

그 소리 앞에 겸허한 모습 보여야

때 마침 오늘은 세월호 6주기다. 대통령 표현대로 “그리움으로 몸마저 아픈 4월”이다.

따져보면 지금의 야당이 국민의 외면을 받은 결정적 계기는 6년 전 세월호 사건이었다.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는 그 때부터 ‘주전자 속 끓는 물’의 심판을 받았다. 4.15 총선에서 승리한 여당은 이 점을 깊이 새겨야 한다.

관련기사

김수영 시인은 “갓난아기의 숨소리보다도 약한 이 노랫소리가 현대의 제악(諸惡)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지만, 못 거꾸러뜨린다고 장담하기도 힘든다”고 썼다. 그는 ‘25시’를 보는 관중들의 조용한 반응에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관중들의 조용한 반응’이 정말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내가 총선 정국에 김수영 시인의 ‘삼동유감’을 다시 읽으면서 하게 된 생각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